로즈 와일리는 21살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미술대학을 다녔지만 결혼과 함께 20여 년간 꿈꿔온 화가의 길은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45세가 되던 1979년, 그림을 포기하지 않은 그는 영국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에 입학하며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졸업 후에도 아티스트로서는 조명 받지 못했지만 그는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2013년 영국 테이트 브리튼,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를 통해 대중적인 사랑을 받기 시작했고, 2014년 영국 현대회화작가에게 주는 상 중 가장 높이 평가되는 ‘존무어 페인팅 상’을 수상하게 된다.
Ⓒ Yellow Strip 2006/ Rose Wylie, Oil and Chalk on Canvas 183 x 777 cm, Photo by Soon-Hak Kwon
76세에 영국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을 통해 ‘영국에서 가장 핫 한 신예 작가’ 중 한 명으로 뽑히게 되면서 미술계의 슈퍼스타로 자리 잡는다. 영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주목 받고 있는 그는 현재 세계 3대 갤러리 중 하나인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 전속 작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Time to Ordinary 보통의 시간 로즈 와일리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림에 반영한다. 뉴스, 역사, 만화, 스포츠, 유명인은 물론 가족, 아틀리에 창밖에 펼쳐진 평범한 풍경까지, 그에게 일상생활은 영감의 원천이다. 이 모든 이미지를 ‘Diary of things’라는 그만의 기억 저장소 속에 넣어 놓고 그림 곳곳에 활용한다. 이처럼 로즈 와일리는 자급자족 방식으로 작업하며, 주변 곳곳에서 소재와 주제를 찾아낸다. 일상적인 것을 바탕으로 천진하면서도 순수한 표현을 그려내는 그는 굳이 ‘예술적’인 소재를 찾아 나서지 않는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6m가 넘는 초대형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데, 거대한 캔버스를 통해 눈에 띄지 않았던 요소들이 확대되어 보여진다. 로즈 와일리의 눈을 빌린 새로운 시각으로 또 다른 세상을 관찰해볼 수 있다.
Film Notes 필름 노트 로즈 와일리는 남다른 영화광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문화 영역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 필름 노트 작업을 ‘예술을 다른 방식으로 번역하는 작업’이라 말한다. 그는 영화 속의 한 장면을 가져와 자르고 클로즈업하여 새롭게 풀어낸다. 영화 프레임 같은 가로형 캔버스를 사용하고 대형 패널을 순서대로 나열, 글자들을 빼곡하게 넣은 작품은 마치 영화의 스토리보드처럼 보여진다. 그는 영화를 보면서 느낀 흥분과 감동을 이미지로 표현하려 노력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시각 언어를 만들고자 했다. 로즈 와일리는 필름 노트를 통해 페드로 알모도바르, 베르너 헤어초크, 쿠엔틴 타란티노, 벨라 타르 등 존경하는 감독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History, News and Advertising 영감의 아카이브 로즈 와일리는 정치, 종교, 명성, 사랑, 역사, 돈과 같은 다양하고 예민한 주제와 관련한 자기 생각과 의견을 솔직하게 캔버스에 담아낸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폭넓은 소재의 사용은 많은 사람들이 쉽고 친근하게 작품에 다가올 수 있게끔 만든다. 대중성은 로즈 와일리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로, 과거의 인물을 현재 유명인의 얼굴로 대체해 관객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영국 켄트 지방에 자리한 로즈 와일리의 작업실은 누군가 쉽게 접근하기 힘든, 온전히 그만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수많은 페인트통과 신문, 종이 조각이 켜켜이 쌓여 있는 혼돈의 공간에서 유쾌하고 강렬한 작품이 탄생한다. 우리는 영국으로 떠나지 않아도 예술의전당 안에서 수년간 로즈 와일리의 초상과 작품을 촬영한 권순학 작가의 사진을 통해 그의 공간을 고스란히 만나볼 수 있다.
Plants and Animals 살아 있는 아름다움 로즈 와일리는 주로 기억 속 이 미지를 소재로 작업하지만 욕실 안 거미 한 마리, 무릎 위에 앉은 고양이 페트(Pete)의 발가락 등 실질적이고 특정한 것에서 영감을 받기도 한다. 동물, 새, 곤충, 나무, 꽃 등 자연 요소들은 로즈 와일리가 사랑하는 소재들이다. 이러한 자연물들은 실제 크기나 비율을 무시한 채 같은 크기로 표현되기도 하고 단순화하거나 오버랩하여 그녀만의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Football 축구를 사랑한 그녀 그리고 손흥민 열렬한 축구 팬이었던 남편 로이 옥슬레이드의 영향을 받은 로즈 와 일리는 영국의 유명 축구팀인 리버풀을 시작으로 첼시, 아스널 등 여러 팀을 좋아하게 된다. 영감의 원천이기도 한 축구는 경기뿐만 아니라 선수 한 명 한 명에게도 집중된다. 팬들에게 환호 받는 ‘축구의 신’들은 방송과 신문을 통해 소개되는 대중적인 아이콘으로서 작업 주제로 훌륭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선수 각자의 매력 포인트와 신체적 특징을 포착해 표현한 작품들은 우리의 흥미를 유발한다. 이 공간에서는 손흥민 선수의 활약이 담긴 2020년 최신작을 비롯해 로즈 와일리와 손흥민 선수가 서로 질문을 주고 받는 영상, 스페셜 아트 워크 등을 만나볼 수 있다.
‘배움에 늦은 나이는 없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종종 듣고는 한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 배움에 대한 욕망이 늘어나는 요즘 더욱 와닿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생각해보면 나이, 숫자에 너무 얽매여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정해진 나이에 의무교육을 수행하고, 취업과 결혼을 하고 그렇게 일련의 흐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로즈 와일리는 달랐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이 예술가임을 잊은 적이 없다. 20대에 결혼해 자식을 키우는 순간에도, 40대에 다시 미술 공부를 시작해 기나긴 무명 생활을 겪어도, 80세에 화가에게 주어지는 가장 명예로운 상을 받을 때에도, 90세를 바라보는 지금도 젊고 아름답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물감으로 얼룩진 운동화를 즐겨 신으며 헐렁한 니트와 오버사이즈 재킷을 멋지게 소화하는 로즈 와일리에게 세월을 이야기하는 건 무의미할 것이다. 팬데믹으로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고 있는 요즘, 젊고 활기찬 에너지를 간직한, 가식적으로 꾸미지 않고 진실하게 다가오는 그의 작품을 통해 소중한 일상을 되짚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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